마음공부. 꾸준히만 하라.
이번 호 {법공양}에서는 지난 호에 이어 수행의 장애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합시다.
기도·염불·참선 등의 마음닦는 공부를 하다보면,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장애들이 수없이 찾아듭니다. 때로는 기쁨의 마구니, 슬픔의 마구니. 두려움의 마구니가 찾아들기도 하고, 때로는 망상과 졸음이 온몸을 휩싸여서 우리를 수행과는 전혀 관계없는 상태로 빠뜨려 버립니다.
바로 그러할 때, 어떻게 공부해야 수행의 장애들 극복하고 좋은 결과를 이루어 낼 수 있는가? 어떤 특별한 비결은 없는가? 하지만 특별한 비결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굳이 특별한 비결을 이야기하라면 ‘꾸준히만 해 나가라’는 것 외에는······.
마장을 이기는 방법은 실로 꾸준히 해나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기쁨의 마구니, 슬픔의 마구니, 두려움의 마구니가 걷잡을 수 없는 경우로 몰고 간다할지라도, 꾸준히 하는 사람은 이기지 못합니다. 백일기도 등의 수행을 반 이상하였을 때 흔히 나타나는 이들 마구니들이 우리를 영영 다른 길로 몰아갈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수명이7일 또는 10일 정도에 불과합니다.
끝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더라도 끊임없이 기도를 하고, 슬픔에 잠겨 목탁을 팽개치게 될지라도 눈물을 흘리며 계속 기도를 하고, 공포에 휩싸여 법당에 들어가기 싫을지라도 억지로 들어가 기도하기를 계속하면, 10일 정도 후에는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 기도를 더욱 잘 할 수 있습니다.
결코 그러한 때에 꺾이면 안됩니다. 꺾이면 수행이 허사로 돌아가고, ‘나’는 원래 자리로, 아니 원래보다 더 못한 자리로 떨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만 마구니에게 흔들리지 않고 원래 하고 있던 기도. 참선 등 을 계속하게 되면 마구니는 의지할 곳을 잃어 저절로 떨어져나가고, ‘나’는 보다 높은 경지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참선을 하여 도를 깨닫고 기도를 하여 소원을 성취하는 것은 성심껏 꾸준히 한 결과일 뿐, 별다른 비결이 있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곧 전심전력을 다할 때 도는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옛날, 중국의 스님 두분이 함께 정진하며 약속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먼저 도를 깨달으면, 남은 사람을 제도 해주자.”
두 스님은 서로 경쟁을 하며 열심히 도를 닦았습니다. 한 스님이
조실(祖室)스님을 찾아가면 다른 스님은 몰래 뒤따라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엿듣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선의의 경쟁을 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스님이 조실스님 방으로 들어가 문답을 하는 것을 다른 스님이 열심히 듣는데, 제일 마지막의 한마디가 떨어지기 무섭게 조실스님께서 무릎을 탁 치며 인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도를 깨쳤구나.”며칠 후 조실스님은 대중을 모두 불러모아 선언하였습니다.
“이 산중에 새로운 조실스님이 탄생하였다. 그에게 나의 자리를 넘기나니, 대중들은 새 조실스님을 모시고 부지런히 정진해라. 나는 다른 곳으로 떠나려 하노라.”
도를 깨달은 스님이 조실이 되자, 도를 깨닫지 못한 스님이 부탁을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약속한 것을 잊지 않고 있겠지? 자네와 조실스님께서 나누는 대화는 모두 엿들었는데 마지막 한마디를 놓치고 말았네. 그 한마디를 나에게도 가르쳐 주어 도를 이를 수 있도록 해주게나.”
“그래, 그 약속은 분명히 지켜야지. 하지만 지금은 입장이 약간 달라졌어. 나는 조실이 되었고 자네는 아직 깨치지를 못했으니, 자네가3년 동안 내 시봉(侍奉) 노릇을 하게. 3년이 지나면 자네가 놓친 대화를 일러 주겠네.”
나이 차이도 없는 친한 친구 밑에서3년 동안이나 시봉을 한다는 것.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야속한 노릇이었지만,오직 ‘도’를 이루기 위해 수락했습니다.
“좋다.”
그로부터3년, 겉으로는 정성껏 친구 조실스님을 모셨지만 속으로는 고민이 부글부글 끓었고, 그 마지막 한마디를 놓친 것이 그렇게 아까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스님은 마음 고생으로 빠착 빠착 말라갔고, 가끔씩 질문을 하여도 조실스님은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그 한마디를 제발 가르쳐 주시오.”
“3년 시봉 기한이 끝나면 가르쳐 주지. 그 전에는 안돼.”
그리고는 자꾸 말라가는 사람에게 새 조실스님은 일만 시켰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 시봉스님의 몸은 야위었고, 약속한3년이 거의 다 되었을 때는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시봉스님은 결심했습니다.
“그 한마디가 도대체 무엇이건데? 저놈의 새끼! 조실이고 지난 날의 도반이고 이젠 보기 싫다. 확 죽여버릴거야. 친구 사이에3년을 시중들게 해놓고 끝내 말 한마디 아까워 하는 놈! 그래. 나를 말려 죽여라. 죽기 전에 네놈부터 죽여버리리라.”
시봉스님은 칼을 갈았습니다. 그리고 조실스님께 마지막으로 간청했습니다.
“나의 목숨도 이제 며칠이 남지 않은 듯합니다. 제발 죽기 전에 마지막 그 한마디를 가르쳐 주십시오.”
하지만 조실스님은 냉냉했습니다.
“3년이 덜 찼으니 안된다.”
“마지막 소원이요 제발 가르쳐 주시오.”
아무리 간청을 해도 조실스님이 꿈쩍도 하지 않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습니다.
“야. 이놈아! 네놈이 나와 한평생 도반으로 지내면서 거듭거듭 약속까지 해놓고 이제와서 못 가르쳐 줘? 에잇, 이 나쁜 놈! 죽여버릴테다.”
시봉스님이 칼을 들고 달려들자 조실스님은 싱긋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 말이 그렇게도 듣고 싶나?”
“그래, 꼭 들어야겠다.”
“그래? 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래?”
“그때는 너 죽고 나 죽는거다.”
“그 말 듣는 것을 우리 둘의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면 내 말 해주지. ‘밥그룻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시봉스님은 흘연히 대오(大悟)하였습니다. 깨치고 나니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도반이 얼마나 자기를 위해주었는가를 알 수 있었고, 병 또한 씻은듯이 나았습니다.
그는 도반인 조실스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다시3년 동안을 정성껏 시봉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간절한 의심’, 그것이 시봉스님의 도를 이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마음을 닦는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목숨조차 마다하고 전심전력을 하는 속에 도가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전심전력하는 사람은 막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지독한 마구니도 전심전력하는 사람은 이길 수가 없습니다. 전심전력을 하다보면 ‘마음의 힘이다’, ‘육체의 힘이다’ 할 것 없이, 온통 똘똘 뭉쳐진 수행의 기운만 남게 되고, 그 기운이 모든 장애와 마구니를 뚫고 나아가 끝까지 가버리게 되면 저절로 이루어지 는 것입니다.
“밥그룻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곧 ‘조실스님께서 깨달음의 신표로 주는 바리때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라고 한 말이 어떻게 도를 이루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수행의 걸림돌은 결코 마구니가 아닙니다. 결국은 ‘나’의 자세입니다. 전심전력을 다하고 성의를 다하면 마구니는 저절로 사라지고, 바라는 일은 그대로 다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장애가 생기고 마구니가 깃들면 오히려 스스로에게 다짐하십시오.
‘지금이 고비요 지금이 기회다. 도(道)가 익으면 마(魔)도 성해지는 법. 지금의 장애는 도가 익어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요, 마구니야말로 나의 업이 녹는 모습이다. 모든 장애는 도를 이루는 밑거름이 된다. 어찌 이 좋은 기회를 스스로 놓치리. 어떠한 마장이 올지라도 벗하지 말고 한결같이 나아가자 한결같이 행하기만 하면 성취가 가깝고 깨달음이 가깝다.’
이렇게 다짐하면서 꾸준히 공부를 지어가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찾았으면 더욱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찾고,화두로써 공부를 하면 더욱 열심히 화두를 들어야 합니다. 완전히 자리가 잡힐 때까지 꾸준히 공부를 지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거나 참선을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자리를 잡지 못하는 데 있고, 자리를 잡끼 위해서는 여러 고비를 넘기고 또 넘겨야 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숟가락질을 배울 때처럼 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숟가락질을 할 때는 어머니가 숟가락을 잡는 법에서부터 숟가락으로 밥을 뜨고 국을 뜨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때 아이는 숟가락을 이상하게 잡기도 하고 자기 입에 넣는 밥도 자꾸 자꾸 흘립니다. 그러나 조금만 익숙해지면 아이의 숟가락질은 차츰 익숙해지고 마침내 아이는 스스로 요령을 습득하여 깜깜한 곳에서도 밥을 흘리지
않고 입안으로 잘 넣게 됩니다.
이처럼 처음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이 정신을 모아서 기도나 참선을 꾸준히 행하다보면 공부의 요령도 차츰 자리를 잡게 됩니다.
결코 밖에서 기대하지 마십시오. 누구도 ‘나’의 공부자리를 잡아주는 이는 없습니다. 오직 ‘나’만이 ‘나’의 공부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흔들림 없는, 안정된 공부자리를 잡을 때까지 우리는 애쓰고 또 애써야 합니다. 의식의 상태가 아니라 무의식의 상태에서도 저절로 화두가 들리고 염불이 될 수 있는 자리까지 가야 올바른 성취를 보게 됩니다.
보다 냉정하게 이야기하연,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의식 (意識)’의 상태에서는 절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차원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공부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끊임없이 의식을 동원해야 합니다.
‘이 무엇고’ 화두를 하면 일부러 의식을 움직여서 ‘이 무엇고’를 하고,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일부러 의식을 흔들어서‘관세음보살’을 해야 합니다.
일부러 의식을 움직이고 의식적으로 생각을 끌어내는 이 상태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자리를 체험할 수 없지만,죽으나 사나 그렇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억지로라도 의식을 불러일으켜 ‘이 무엇고’, ‘관세음보살’을 하고, 잊어버리고 놓쳐버리면 또 의식적으로 하고 또 하고····.
이렇게 노력을 하다보면 나중에는 말이 필요없고 설명이 필요없는 제3의 세계,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자리를 체험하게 됩니다.
참으로 문제는 고비를 넘기지 못하여 계속 방황하는 데 있습니다.
실로 우리 불자들 중에는 기도를 하거나 참선을 하고 있을 때 오히려 집안이 거꾸로 돌아가는 경우를 체험한 분이 많을 것입니다.
정녕, 공부를 하다보면 이상하데도 뜻밖의 사건이 터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뜻하지 않는 사건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때를 잘 넘겨야 합니다.
참으로 중요한 고비는 바로 이 때입니다.
절에 와서 백일기도를 하다보면 묘하게도 가족들이 찾아와 시험을 합니다. 남편이 와서 “주부노릇도 못하면서 기도는 무슨 기도!”라며 소리를 지르고 폭력을 가하는가 하면, 아이들이 울면서 찾아와 “집안이 엉망이니 돌아가자.”고 합니다. 때로는 부도가 나고 주변 사람이 다치는 사고까지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이 약해져 버립니다. “집안이 절단날 판에 기도는 무슨 기도!”
“내가 없으니 집안이 쑥밭이구나. ‘나’의 기도를 하고 못하고는
문제가 아니다. 집안부터 편안하게 만들어야지.”
이렇게 희생적인 생각을 일으켜 기도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간들 생각처럼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기도를 시작하기 전보다 나아지는 것은 조금도 없고 집안은 더욱 거꾸로 돌아갈 뿐입니다.
일단 오랜 생각 끝에, 또 꼭 필요에 의해, 그리고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기도를 시작하였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합니다. “이 몸뚱이가 죽어지든, 집안이 터져버리든, 자식이 뿔뿔이 홑어지든, 남편이 딴 여자를 얻든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밀고 나가 고비를 넘기고 나면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내 몸이 자리를 잡고 내 마음이 자리를 잡게 되면 가족들도 모두 제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돌리려고 하지 않아도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곧 이 법계(法界)의 법칙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바지에 와서 겁을 먹고 타협하여 고비를 넘기지 못한 채 주춤하면 여태까지 애써 기도한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립리다.
대구에 살고 있는 신도 한분은 남편의 사업이 잘되지 않자 기도를 하겠다며 남해안의 이름있는 기도 도량을 찾아갔습니다. 그녀는 삼칠일(21일)을 작정하고 부지런히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기도하였는데, 열흘이 조금 지나자 집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부도 직전이니 빨리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하는 중에 부도 직전이라니! 관세음보살님도 너무하시는 구나.’
실망한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주위 사람들에게 빛이라도 내어볼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도 직전의 집안에 돈을 빌려줄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또 생각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남편과 자식을 위로하고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도리라고····. 하지만 그것 또한 인정이요 애착일 뿐 진정한 해결방법 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방법이 아니라면····. 차라리 관세음보살님께 매달려 보자.’
생각을 고쳐먹은 그녀는 간절히 간절히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열심히 기도하여 삼칠일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보니 부도 직전의 사업체가 뜻밖의 특별융자를 얻어 다시 살아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사업이 더욱 잘되어 지금은 누구도 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보살님처럼 기도를 하든 참선을 하든 기간을 정하고 시작을 하였으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끝을 보고자 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모든 일은 될만큼 되는 법입니다. 마음공부 도중에 고비가 생기고 시련이 닥쳐오면 스스로를 경책하십시오.
“터질려면 터져라. 될대로만 되어라. 집안이 터져나가든 살림살이가 거꾸로 돌아가든 내가 지금 어떻게 할 바가 아니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오직 이 기도와 이 수행! 나머지는 모두가 마구니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밀고 나아가서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다 깨어져버리고 터져버릴 것 같았던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어 제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런데 겁을 집어먹고 물러서 보십시오. 모든 것이 후퇴를 해버립니다. 기도 참선 등의 공부뿐만이 아니라 문제해결도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립니다. 곧 마구니에게 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참선 등의 공부를 할 때는 인정에 끄달리지도 말고, 애착에 끌려가지도 말고 성심껏 내가 지금 해야할 ‘그것에 몰두하십시오. 집안이 쑥밭이 되든 누가 죽어간다 하든 돌아보지 말고 전진하십시오. 전진하면 모든 문제는 사라집니다. 모든 마구니는 자취를 감춥니다.
실로 우리 불교집안의 마음 공부를 하다보면 고비가 너무나 많습니다. 왜 고비가 많고 장애가 많은가?
시작없는 옛적부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젖은채 너무나 많은 산을 쌓고 너무나 많은 구덩이를 파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정·혜 삼학을 닦는 이 순간에 스스로가 파놓았던 수많은 장애들이 모습을 들어내어 수행의 길, 부처가 되는 길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고비를 만나고 마구니가 찾아들면 겁을 먹지 말고 용맹스러운 자세로 임하십시오.
‘터질테면 모두 터져라.’ 이렇게 작정하고 참선, 기도 등에 전심전력으로 몰두하여 삼매의 길로 들어서십시오. 정녕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가면 두려을 것이 없습니다. 공포의 마구니도 기쁨의 마구니도 짐짓 나타나는 불보살의 모습도 ‘나’를 흔들지 못합니다.
삼매에 들어서고 흔들림 없는 자리에 들어서면 공부의 끝은 가깝습니다. 결코 마장을 이겨내고 성취를 이루는 데는 특별한 비결이 없습니다. 흔들림 없이 꾸준히 하는 것, 그것밖에는 특별한 비결이 없습니다.
깊이 깊이 명심하고 공부를 지어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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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daum.net/mahatop7/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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